혈액으로 알아낼 수 있는 질병: 건강 상태를 읽는 체내 신호
혈액은 인체 내부의 상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생체 지표 중 하나다. 우리 몸속을 순환하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면역 세포와 호르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혈액은 단순한 체액이 아니라 인체 전반의 기능을 보여주는 '건강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 의학에서 혈액검사는 다양한 질병의 조기 진단, 진행 상황 확인, 치료 반응 평가에 핵심적인 수단으로 사용된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한 혈액 수치뿐 아니라 유전자, 단백질, 면역 물질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혈액만으로도 수많은 질병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1. 감염 질환: 혈액은 면역 반응을 말해준다
가장 흔하게 혈액검사로 진단되는 질환은 각종 감염성 질환이다.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등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은 인체 면역계에 반응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백혈구 수치나 염증 지표가 변화한다.
- 백혈구(WBC) 수치: 백혈구 수가 증가하면 일반적으로 세균성 감염을 의미하고, 감소는 바이러스성 감염이나 면역 기능 저하를 시사한다.
- CRP와 ESR: C-반응단백(CRP)과 적혈구침강속도(ESR)는 염증이 있을 때 상승하며, 감염뿐 아니라 자가면역질환에서도 중요 지표가 된다.
- 특정 병원체 항체 검사: B형 간염, C형 간염, HIV, 매독, 코로나19 등은 혈청 내 항체나 항원을 확인하여 진단할 수 있다.
2. 빈혈과 혈액질환: 혈액 성분 자체의 이상
혈액의 구성 성분(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자체에 문제가 있을 때도 혈액검사로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 적혈구 수 및 헤모글로빈(Hb): 수치가 낮으면 빈혈을 의심할 수 있다. 철결핍성 빈혈, 비타민B12 결핍성 빈혈, 만성 질환성 빈혈 등 유형별 감별이 가능하다.
- MCV, MCH: 적혈구의 크기와 평균 혈색소 함량을 측정하여 빈혈의 원인을 분류한다.
- 혈소판 수치: 혈소판 감소는 자가면역질환, 바이러스 감염, 골수질환 등을 시사하며, 반대로 증가 시 혈전 질환의 위험이 있다.
- 백혈병 및 림프종: 비정상 백혈구 증가, 암세포 검출 등으로 혈액암을 진단할 수 있다. 말초 혈액도 중요하지만, 골수검사를 병행할 수 있다.
3. 간 기능 및 간 질환
간은 체내의 대사와 해독 작용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으로, 간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혈액 내 효소 수치가 변화한다.
- AST(GOT), ALT(GPT): 간세포 손상 시 증가하며, 급성 간염, 지방간, 간경변의 지표가 된다.
- γ-GTP, ALP: 알코올성 간질환이나 담즙정체성 간질환에서 상승한다.
- 빌리루빈: 황달 유무 판단에 중요하며, 간기능 저하 또는 담도 폐쇄 여부를 가늠한다.
- HBsAg, HCV Ab: B형 및 C형 간염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혈청 항원 및 항체로 확인할 수 있다.
4. 신장 기능과 전해질 이상
신장은 혈액 속 노폐물과 수분을 걸러주는 기관으로, 혈액 내 요소질소(BUN)와 크레아티닌(creatinine) 수치로 신기능을 평가할 수 있다.
- BUN, Creatinine: 수치 상승은 신장 기능 저하 또는 탈수 등을 의미할 수 있다.
- eGFR: 만성 신부전 조기 진단에 유용한 수치로, 신장의 여과 능력을 수치화한 지표이다.
- 전해질(Na, K, Cl 등): 나트륨, 칼륨 등의 전해질 농도는 체내 수분 균형 및 심장/근육 기능과 관련된다.
5. 심혈관계 이상과 대사질환
심혈관계 질환은 혈액 속 지질, 당 수치, 단백질 상태 등을 통해 조기 발견이 가능하다. 특히, 심장 질환 위험 예측과 관련된 수치는 정기 검진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 총 콜레스테롤, HDL, LDL, 중성지방: 이상지질혈증 진단과 심혈관질환 예방을 위한 필수 지표.
- 고감도 CRP(hs-CRP): 동맥경화와 관련된 만성 염증 상태를 반영하는 민감한 염증 마커.
- Troponin, CK-MB: 심근경색 진단에 쓰이는 효소로, 급성 심장 손상 시 상승한다.
- NT-proBNP: 심부전 진단 및 예후 평가에 사용되며, 심장의 부담 정도를 보여준다.
6. 내분비 및 호르몬 질환
호르몬 분비 이상은 혈액검사를 통해 쉽게 진단 가능하며, 내분비계 기능 저하나 항진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다.
- TSH, FT4: 갑상선 기능 항진증 또는 저하증의 대표적인 진단 지표.
- HbA1c, 공복혈당: 당뇨병의 진단과 관리에 사용되며, 최근 평균 혈당을 반영하는 지표다.
- ACTH, Cortisol: 부신 기능 검사. 쿠싱증후군이나 애디슨병의 감별에 사용된다.
- LH, FSH, 에스트로겐, 테스토스테론: 성선 기능 저하, 조기 폐경, 불임 등의 원인 진단.
7. 암 진단과 추적 관찰
최근 혈액으로 암을 조기에 진단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종양표지자나 유전자 돌연변이 탐지를 통해 일부 암을 빠르게 감지할 수 있다.
- CEA, CA19-9, AFP: 대장암, 췌장암, 간암 등의 진단 및 치료 반응 모니터링에 사용된다.
- CA-125, HE4: 난소암의 진단과 추적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표지자.
- PSA: 전립선암 조기 발견에 유용하며, 남성 건강검진 항목으로 포함된다.
- Liquid Biopsy: 혈액에서 순환 종양 DNA(ctDNA)를 추출하여 암 유전자 돌연변이를 감지하는 최신 기술.
8. 자가면역 질환 및 알레르기
면역계 이상으로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이나 알레르기 반응도 혈액검사를 통해 조기 진단할 수 있다.
- ANA(항핵항체), RF: 루푸스, 류머티즘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의 진단에 사용.
- IgE: 알레르기 반응 정도를 나타내며, 음식 알레르기, 아토피, 천식 등에서 측정.
- Anti-CCP 항체: 류머티즘 관절염의 민감도와 특이도가 높은 항체.
결론: 혈액은 가장 강력한 건강 예측 도구
오늘날의 의학 기술은 혈액 한 방울로도 수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하였다. 혈액검사는 간단하고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다양한 질환을 진단하고 추적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감염성 질환에서부터 암, 심혈관계 질환, 자가면역질환, 대사성 질환까지 그 범위는 매우 넓다. 특히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면 아직 증상이 없는 질환도 조기에 발견하여 빠르게 치료할 수 있다. 혈액은 말없이 몸속을 순환하지만, 그 안에는 건강의 모든 단서가 담겨 있다. 우리는 이 ‘침묵의 기록자’를 통해 질병을 조기에 감지하고, 건강한 삶을 설계할 수 있다.